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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한 외관을 한 병원 한편의 장례식장, 이곳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다. 창문조차 없는 빈소에서, 망자의 사진을 앞에 두고 작별을 고하는 장례의식은 대개 죽음으로 인한 부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된다. 병원 장례식장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 도시의 일상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이 오직 ‘삶’만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죽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편한 주제다.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오늘날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며, 때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침묵의 담합’을 이루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죽음을 삶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거리 곳곳에서 접하는 피트니스센터 전단지나 피부과 광고는 질병과 노화에 대한 강한 불쾌감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심리가 있다. 이 사회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혐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유의 빈곤은 죽음을 담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해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장례식장과 공동묘지에서 느꼈던 장묘건축의 ‘가난한’ 속성은 결국 우리 사회에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대한민국은 사회의 각 부분 영역에서 눈부신 성장을 일구며, 빠른 경제 성장을 달성해왔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는 화려한 건축물과 멋진 공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비된다. 하지만 유독 죽음을 담는 공간만은 이러한 흐름에서 소외되어 있다. 장례식장, 봉안당, 화장장, 추모공원 등, 일상에서 경험하는 죽음과 관련된 공간들이 우리의 삶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 이러한 단절은 단지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장묘건축과 관련 공간들이 대중의 관심과 논의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계획되고 조성되어 왔으며, 그 결과 우리는 획일적이고 거친, 사용자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결여된 공간들을 마주하고 있다.
“죽음은 오로지 산 자의 문제이다. 죽은 자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라고 엘리아스는 말했다. 죽음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라면, 장묘건축은 결국 남겨진 이들을 위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인생에서 가장 연약해진 순간에 죽음을 마주한다. 소중한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부재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건축은 보다 다정하게 우리 곁에 머무를 수는 없을까? 부재에서 비롯된 슬픔과 아픔을 포용하는 장묘건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이어지는 글에서는 세계 각지의 장묘건축 사례를 들여다보며, 삶의 끝자락을 품는 장소들이 어떻게 위로와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는지 함께 상상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장묘건축의 모습에 대해 새로운 통찰과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혐오시설로만 여겨졌던 이 공간들이 누군가의 기억을 품고, 마음을 감싸는 건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싶다.
* 서울시건축사신문 2025년 6월호 <장묘건축 탐방 제1편> 에 게재된 글입니다.